몇 년 동안 ‘죽음을 생각하면 삶의 동기가 생긴다’는 조언을 자주 들었다. 그러나 죽음을 떠올리는 일은 나를 움직이지 못했다. 오히려 왜 많은 사람이 이 조언을 믿는지 의문이 생겼다.
몇 달 전 그 의문을 페이스북에 적었고, 댓글에 답하기 위해 내게 죽음이 무엇인지 한 번 제대로 생각해 보기로 했다. 나는 Q방법론의 일부 형식에서 착안해 개인적인 탐색 틀을 만들었다. 이것은 정식 연구나 심리 평가가 아니다. 한 시점의 내 문장을 분류하고 해석한 기록이다.
먼저 “나에게 죽음과 삶은 어떤 의미인가”라는 질문을 놓았다. 죽음과 삶을 설명하는 문장을 만들고, 동의함·중간·동의하지 않음의 세 그룹으로 나눴다. 그런 다음 동의하거나 동의하지 않는 정도에 따라 문장을 다시 늘어놓았다.
죽음에 관한 문장을 보며 나는 사후세계나 심판을 믿지 않고, 죽음이 나를 자극하거나 삶의 질을 높인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했다. 동시에 죽음을 절망과 해방이라는 서로 다른 말로 표현했고, 죽은 뒤에도 어떤 방식으로든 존재하고 싶다고 썼다.
삶에 관한 문장에서는 다른 방향이 드러났다. 태어난 데 특별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살아가며 스스로 의미를 부여한다고 보았다. 가치 있는 생각과 상상을 하고, 무언가를 성취하며,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남길 때 내가 살아 있다고 느낀다고 적었다.
이 문장들을 묶으며 나는 육체적 생명과 개념적 존재를 다르게 보고 있었다고 해석했다. 내게 존재한다는 것은 몸이 살아 있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생각과 일이 다른 사람에게 닿는 일이었다. 그래서 죽음 자체를 떠올리는 일은 동기가 되지 않았고, 죽은 뒤에도 생각의 흔적이 남기를 바라는 욕구가 더 크게 보였다.
삶을 낙관적으로만 본 것도 아니다. 인내와 고통을 당연하게 여기면서도 거기서 벗어나고 싶어 했다. 탁월한 상상과 생각, 성취와 영향력을 원하면서 그 과정의 피로도 함께 느끼고 있었다.
결국 이 탐색이 내게 보여 준 문장은 두 가지였다.
나는 가치 있는 생각과 일을 남겨 오래 존재하고 싶다.
그리고 그 욕망 때문에, 나는 살아 있고 싶다.
이 결론은 모든 사람에게 맞는 죽음과 삶의 뜻이 아니다. 당시 내가 만든 문장과 분류에서 얻은 자기 해석이다. 시간이 지나 같은 문장을 다시 놓으면 순서와 뜻이 달라질 수도 있다.
죽음에 관한 생각이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이어진다면 이런 분류를 혼자 계속하는 것보다 신뢰하는 사람이나 도움을 줄 수 있는 전문가와 현재 상태를 함께 확인하는 편이 낫다. 이 글의 방법은 어려움을 진단하거나 해결하는 도구가 아니다.
나는 죽음을 보려고 문장을 만들었다. 그 문장 끝에서 발견한 것은 죽음의 압박이 아니라 살아 있고 싶어 하는 거대한 욕망이었다.